[임경석의 역사극장]공산당 재건운동 불가능해지자 망명… 주류 그룹에 복종했지만 끝내 숙청양명의 1933년 12월25일자 자필 청원서 첫 페이지.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РГАСПИ)막다른 길에 부딪혔을 때, 양명(梁明)은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하는 길을 택했다. 1930년 중반, 국외 근거지에서 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국제당 동방비서부의 지휘를 직접 받지 않는 당 재건 운동은 모두 ‘종파’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부도덕한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힌 것이다. 국제당은 여태까지 문제 삼지 않던 일국일당 원칙을 국외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하고자 한다면 현지의 공산당에 입당해야 했다. 만주와 상하이, 베이징 등지를 근거지로 활발하게 전개해오던 양명이 속했던 공산당의 재건 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동료들은 제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중국에 계속 체류하기로 한 동료들은 중국공산당에, 일본에 있는 이들은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국내에 잠입해 비합법 노동운동에 뛰어든 동지들도 있었다.28살, 공부 겸 떠난 망명길양명이 러시아 영내에 입국한 때는 1930년 10월25일이었다. 만주 지린성 판스현에서 출발해, 중-소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경로를 택했다.1 두만강 건너편 중국령 훈춘에서 육로로 국경선을 건너 연해주로 들어가는 코스였을 것이다.왜 소비에트 러시아로 입국했는가? 러시아 관헌이 입국 이유를 물었다. 양명은 “중국에서 당 사업을 지도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할 위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마디로 ‘망명’이라고 표현했다.2양명이 러시아 망명을 선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체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2년 전에 그는 3개월간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1928년 10월 말부터 조선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국제당에서 외교 활동에 임했다. 그해 12월 ‘조선공산당 조직문제 결정’과 ‘12월테제’ 채택을 둘러싼 치열한 논의 과정에서 조선공산당(2월당, 속칭 엠엘파)을 대변했다.3 비록 자기 당의 입장을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국제당으로부터 조선당 대표에 상응하는 정중한 예우를 받았다.국제당 동방비서부 조선위원회 1930년 11월4일자 회의록. 제3항에 양명에 관한 건이 적혀 있다.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РГАСПИ)모스크바를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유학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얼마 동안 공부를 시켜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심을 갖고 있었다.4 러시아어 능력[임경석의 역사극장]공산당 재건운동 불가능해지자 망명… 주류 그룹에 복종했지만 끝내 숙청양명의 1933년 12월25일자 자필 청원서 첫 페이지.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РГАСПИ)막다른 길에 부딪혔을 때, 양명(梁明)은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하는 길을 택했다. 1930년 중반, 국외 근거지에서 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국제당 동방비서부의 지휘를 직접 받지 않는 당 재건 운동은 모두 ‘종파’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부도덕한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힌 것이다. 국제당은 여태까지 문제 삼지 않던 일국일당 원칙을 국외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하고자 한다면 현지의 공산당에 입당해야 했다. 만주와 상하이, 베이징 등지를 근거지로 활발하게 전개해오던 양명이 속했던 공산당의 재건 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동료들은 제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중국에 계속 체류하기로 한 동료들은 중국공산당에, 일본에 있는 이들은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국내에 잠입해 비합법 노동운동에 뛰어든 동지들도 있었다.28살, 공부 겸 떠난 망명길양명이 러시아 영내에 입국한 때는 1930년 10월25일이었다. 만주 지린성 판스현에서 출발해, 중-소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경로를 택했다.1 두만강 건너편 중국령 훈춘에서 육로로 국경선을 건너 연해주로 들어가는 코스였을 것이다.왜 소비에트 러시아로 입국했는가? 러시아 관헌이 입국 이유를 물었다. 양명은 “중국에서 당 사업을 지도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할 위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마디로 ‘망명’이라고 표현했다.2양명이 러시아 망명을 선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체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2년 전에 그는 3개월간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1928년 10월 말부터 조선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국제당에서 외교 활동에 임했다. 그해 12월 ‘조선공산당 조직문제 결정’과 ‘12월테제’ 채택을 둘러싼 치열한 논의 과정에서 조선공산당(2월당, 속칭 엠엘파)을 대변했다.3 비